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궁과 월지 (문단 편집) == 명칭 == 대중에게 '''안압지'''([[雁]][[鴨]][[池]])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안압지는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 [[동국여지승람]]과 [[동경잡기]] 등에 기록된 것이다. [[조선시대]]에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이곳 호수에 [[기러기]](雁)와 [[오리]](鴨)들이 날아들자 [[https://n.news.naver.com/mnews/article/088/0000075953?sid=102|안압지]]라는 이름을 붙였다. 그러나 [[1980년]]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[[토기]] 파편 등으로 [[신라시대]]에 이 호수를 월지(月池)라고 불렀다는 [[https://www.kbmaeil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905315|사실]]을 확인하였다. '월지'란 명칭은 반월성(半月城: [[경주 월성]])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고, 임해전(臨海殿)의 이름도 원래는 [[https://www.kyongbuk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475474|월지궁]]이다.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2011년 7월부터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'안압지' 대신 '동궁과 월지'로 [[https://n.news.naver.com/mnews/article/001/0005185103?sid=103|변경]]되었고 각종 안내문에서도 변경된 명칭을 따랐다. 그러나 조선시대 이래로 안압지로 알려진 기간이 워낙 길어서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압지라고 부르고 표기하기도 한다. 동궁과 월지에 비해 부르기도 더 쉬운 점도 한몫한다. 다만 [[신라]] 시기에도 '임해전'이란 명칭을 일부 쓰기도 한 듯하다. [[삼국사기]]에는 동궁을 임해전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. '[[바다]]와 가까운 건물'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상징화했다고 추정한다. 해당 건물군들 주변 [[연못]]가에서 금동판불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보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의례를 거행했을 가능성도 있다. 즉, 월지를 만든 시기가 [[나당전쟁]] 당시인 데다가 [[김유신]]이 사망한 뒤 [[지진]], [[반란]]이 일어나고 [[호랑이]]가 궁궐에서 나오는 등 흉흉한 시절이다 보니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국난 극복용으로 어떤 의례를 거행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. 그 외에 [[https://product.kyobobook.co.kr/detail/S000001976031|춘궁(春宮) 혹은 청궁(靑宮)]]이라고도 불렀다. 동쪽은 [[봄]]을 관장하는 [[청룡]]의 [[방위]]이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